▒ 아! 붓다 ▒
보시를 통한 마음공부
松 河
2020. 7. 2. 09:44
보시를 통한 마음공부
절간을 드나드는 내게 누군가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표현해 보라고 한다면 저는 방하착(放下着)을 들겠습니다.
공(空)과 중도(中道)와 연기(緣起), 무아(無我)와 삼법인(三法印)과 사성제(四聖諦). 어렵사리 보고, 들으며 조금씩 이해해 가는 과정에 나름 느낀 것입니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부처님 말씀이 꼭이 아니더라도 인연 따라 생(生)함과 멸(滅)함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 세상 어느 한 물건도 멸하지 않는 것이 없는데 잠시 왔다가는 모든 것을 내 것이라고 집착(執着)하여 괴로움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내 것이 생기고 내가 옳다는 마음이 생기니 상대가 생겨나고, 상대가 생겨나니 분별심이 생겨납니다. 이에 부처님 말씀처럼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빠져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는 극단의 분별망상으로 결국 업(業)을 짓게 됩니다.
이 모두가 마치 지금의 나를 두고 하는 말 같습니다.
그래도 너는 아니야!!! 중. 너!!! 이걸 고치지를 못합니다.
이 중생......
금강경에서 일체 삼라만상은 空한 것이니, 相이, 相이 아님을 바로 보면 여래를 볼 것이라 했습니다. 이 같은 진리의 말씀을 앞에 두고도 깨닫지 못하는 이 사람은 ‘중생이기에 그러합니다.’라는 궤변으로 이를 모면해 보고자하며, 분별심에 의해 저런 나쁜! 하며 생겨나는 분노를 소멸하는 방편으로, 방하착을 그저 주문처럼 외고 다니어 낮추고 비우려는 노력을 무진장 기울이고 있다는 말로 핑계를 삼고자 합니다.
어떻든 이처럼 절간을 드나드는 가운데 우리 불자들은 배운 바대로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행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또한 베풀었다고 집착하는 마음 없이 상(相)을 남기려 하지 않기에 방하착의 실천행이라 할 수 있겠지요.
무주상보시가 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청정해야 합니다. 보시하는 사람(施者)과 보시하는 물건(施物), 그리고 보시를 받는 사람(受者) 모두가 깨끗해야 한다는 것입니다.〔삼륜청정(三輪淸淨)〕부정한 사람이 도둑질을 하거나 나쁜 방법으로 얻은 재물을 누군가에게 베푸는 것은 무주상보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보시의 종류를 들어 보면, 이종시(二種施) · 삼종시(三種施) · 사종시(四種施) · 팔종시(八種施)로 나누어지고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재시 · 법시 · 무외시(無外施)의 삼종시를 널리 채택하고 있습니다.
재시는 능력에 따라 재물을 보시하여 재물을 구하는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것.
법시는 진리를 구하는 사람에게 자기가 아는 만큼의 올바른 불법을 설명해주어 그 사람의 수련을 돕는 것.
무외시는 어떤 사람이 공포에 빠졌을 때 자신이 어려움을 대신하여 그 사람이 공포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혹자들은 보시를 두고 소위 전문 용어를 나열하면서 너무 어렵게 설명함으로 ‘불교 교리가 무진장 어려운 것이나 나는 이처럼 해박하여 다 알고 있다’라는 아상으로 삼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보시를 두고 ’자신의 깨달음이나 일체 중생의 성불(成佛)이라는 데로 그 뜻이 확산되어 가는 것이다’라고 거창하게 설명하는 것 보다 보시는 주는 것이지만 주되, 베풀었다고 생색내지 말고, 대가도 바라지 말고 그저 자비심의 마음으로 주면 족한 것이다. 그렇게 주다 보면 그것이 저절로 이타를 생각하는 마음이 되고 반야의 마음이 되어 성불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다. 다만 깨끗한 물건으로 깨끗이 주고받아야 하느니라. 이렇게 설명하면.... 참 쉬울 텐데.... ^^
보시는 사회적 실천을 중시하는 대승불교의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며, 6바라밀 가운데 첫 번째 실천 덕목에 속합니다. 이에 우리 불자들은 걸림 없는 마음 닦음의 한 방편으로 무주상보시하여야 할 것입니다.
.
.
그런데!!!!
이 무지한 중생은 근간에 이러한 생각이 들어 좀 짜증이 나기도 합니다.
집착이 생긴 거지요.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주어라. 라는 말씀처럼 들리는 보시행을 미력하나마 십시일반 이행하고 있는 우리 불자들이 어쩌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보시를 행함으로 해서 오히려 저들을 살찌게 하고 비대하게 하며 허위와 허식으로 직업화된 승려를 만들어 내는데 일조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아이러니하게도 부처님 말씀을 따르고 있는데 그것이 도리어....
머리 깍은 승려가 삼의일발(三衣一鉢: 갈아입을 세벌의 옷과 밥그릇)에 만족하지 아니하고 세간에 나도는 대한민국 최고의 승용차를 굴린다거나 룸싸롱에 드나든다거나, 공금을 유용한다거나, 노름을 한다거나, 성추행 추문에 오르내린다거나, 성노예의 굴욕을 앵벌이 삼아 수금 한 돈을 전용한다거나, 옥상옥을 만들어 사부대중의 화합이 아니라 우바새 우바이 위에 군림하려 든다거나 .....
아! 이 모두가 물질만능에 젖어 들게 한 보시의 폐단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무주상보시의 참 뜻을 되 뇌여 보게 합니다. 무주상보시........무주상보시라...
그러나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출가하신 스님들의 안위를 보호해야 하는 불자들이기에 부처님 말씀을 쫒아 무주상보시의 행을 이어가도록 해야겠습니다.
판단은 부처님께서 하시겠지요. 따귀를 때려 지옥으로 보내든지 하는 건.
절간을 농단하거나 말거나..... 그건 그들의 업보이고
흙탕물을 일으키는 미꾸라지 몇 마리를 보고 승가를 폄훼한 죄는 나의 업보이니.....
절대 다수의 스승이신 스님들께 진심으로 참회합니다.
- 능우 합장 -
절간을 드나드는 내게 누군가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표현해 보라고 한다면 저는 방하착(放下着)을 들겠습니다.
공(空)과 중도(中道)와 연기(緣起), 무아(無我)와 삼법인(三法印)과 사성제(四聖諦). 어렵사리 보고, 들으며 조금씩 이해해 가는 과정에 나름 느낀 것입니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부처님 말씀이 꼭이 아니더라도 인연 따라 생(生)함과 멸(滅)함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 세상 어느 한 물건도 멸하지 않는 것이 없는데 잠시 왔다가는 모든 것을 내 것이라고 집착(執着)하여 괴로움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내 것이 생기고 내가 옳다는 마음이 생기니 상대가 생겨나고, 상대가 생겨나니 분별심이 생겨납니다. 이에 부처님 말씀처럼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빠져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는 극단의 분별망상으로 결국 업(業)을 짓게 됩니다.
이 모두가 마치 지금의 나를 두고 하는 말 같습니다.
그래도 너는 아니야!!! 중. 너!!! 이걸 고치지를 못합니다.
이 중생......
금강경에서 일체 삼라만상은 空한 것이니, 相이, 相이 아님을 바로 보면 여래를 볼 것이라 했습니다. 이 같은 진리의 말씀을 앞에 두고도 깨닫지 못하는 이 사람은 ‘중생이기에 그러합니다.’라는 궤변으로 이를 모면해 보고자하며, 분별심에 의해 저런 나쁜! 하며 생겨나는 분노를 소멸하는 방편으로, 방하착을 그저 주문처럼 외고 다니어 낮추고 비우려는 노력을 무진장 기울이고 있다는 말로 핑계를 삼고자 합니다.
어떻든 이처럼 절간을 드나드는 가운데 우리 불자들은 배운 바대로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행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또한 베풀었다고 집착하는 마음 없이 상(相)을 남기려 하지 않기에 방하착의 실천행이라 할 수 있겠지요.
무주상보시가 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청정해야 합니다. 보시하는 사람(施者)과 보시하는 물건(施物), 그리고 보시를 받는 사람(受者) 모두가 깨끗해야 한다는 것입니다.〔삼륜청정(三輪淸淨)〕부정한 사람이 도둑질을 하거나 나쁜 방법으로 얻은 재물을 누군가에게 베푸는 것은 무주상보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보시의 종류를 들어 보면, 이종시(二種施) · 삼종시(三種施) · 사종시(四種施) · 팔종시(八種施)로 나누어지고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재시 · 법시 · 무외시(無外施)의 삼종시를 널리 채택하고 있습니다.
재시는 능력에 따라 재물을 보시하여 재물을 구하는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것.
법시는 진리를 구하는 사람에게 자기가 아는 만큼의 올바른 불법을 설명해주어 그 사람의 수련을 돕는 것.
무외시는 어떤 사람이 공포에 빠졌을 때 자신이 어려움을 대신하여 그 사람이 공포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혹자들은 보시를 두고 소위 전문 용어를 나열하면서 너무 어렵게 설명함으로 ‘불교 교리가 무진장 어려운 것이나 나는 이처럼 해박하여 다 알고 있다’라는 아상으로 삼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보시를 두고 ’자신의 깨달음이나 일체 중생의 성불(成佛)이라는 데로 그 뜻이 확산되어 가는 것이다’라고 거창하게 설명하는 것 보다 보시는 주는 것이지만 주되, 베풀었다고 생색내지 말고, 대가도 바라지 말고 그저 자비심의 마음으로 주면 족한 것이다. 그렇게 주다 보면 그것이 저절로 이타를 생각하는 마음이 되고 반야의 마음이 되어 성불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다. 다만 깨끗한 물건으로 깨끗이 주고받아야 하느니라. 이렇게 설명하면.... 참 쉬울 텐데.... ^^
보시는 사회적 실천을 중시하는 대승불교의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며, 6바라밀 가운데 첫 번째 실천 덕목에 속합니다. 이에 우리 불자들은 걸림 없는 마음 닦음의 한 방편으로 무주상보시하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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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무지한 중생은 근간에 이러한 생각이 들어 좀 짜증이 나기도 합니다.
집착이 생긴 거지요.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주어라. 라는 말씀처럼 들리는 보시행을 미력하나마 십시일반 이행하고 있는 우리 불자들이 어쩌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보시를 행함으로 해서 오히려 저들을 살찌게 하고 비대하게 하며 허위와 허식으로 직업화된 승려를 만들어 내는데 일조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아이러니하게도 부처님 말씀을 따르고 있는데 그것이 도리어....
머리 깍은 승려가 삼의일발(三衣一鉢: 갈아입을 세벌의 옷과 밥그릇)에 만족하지 아니하고 세간에 나도는 대한민국 최고의 승용차를 굴린다거나 룸싸롱에 드나든다거나, 공금을 유용한다거나, 노름을 한다거나, 성추행 추문에 오르내린다거나, 성노예의 굴욕을 앵벌이 삼아 수금 한 돈을 전용한다거나, 옥상옥을 만들어 사부대중의 화합이 아니라 우바새 우바이 위에 군림하려 든다거나 .....
아! 이 모두가 물질만능에 젖어 들게 한 보시의 폐단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무주상보시의 참 뜻을 되 뇌여 보게 합니다. 무주상보시........무주상보시라...
그러나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출가하신 스님들의 안위를 보호해야 하는 불자들이기에 부처님 말씀을 쫒아 무주상보시의 행을 이어가도록 해야겠습니다.
판단은 부처님께서 하시겠지요. 따귀를 때려 지옥으로 보내든지 하는 건.
절간을 농단하거나 말거나..... 그건 그들의 업보이고
흙탕물을 일으키는 미꾸라지 몇 마리를 보고 승가를 폄훼한 죄는 나의 업보이니.....
절대 다수의 스승이신 스님들께 진심으로 참회합니다.
- 능우 합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