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야(歲寒然後 知松栢之後彫也)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야(歲寒然後 知松栢之後彫也)
호시절에 어떤 존재를 판단하기는 어렵다. 좋을 때 좋은 모습을 보이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누구나 가능하나 반면 시련의 순간에는 대부분 그러하지 않기에 한 존재의 참모습을 알기에는 호시절이 적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수년간 부동산 침체가 장기화됨에 따라 부동산업계의 인적 구성이 많이 달라지고 있다고 한다.
마냥 호시절 일 것 같이 좋은 모습과 좋은 얼굴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던 사람들이 저마다의 이해에 따라 갈라서고 등 돌리며 일순 태도를 달리하는 것이 두드러져 보이기 때문이다.
이에 필자는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야(歲寒然後 知松栢之後彫也)라는 말을 떠올리며 주변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는다.
“사람이 어려운 지경에 처했을 때야 비로소 절의가 드러나는 법이다. 아무런 걱정 없이 살 때에는 서로 아껴주며 술자리나 잔치 자리에 부르곤 한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이해관계가 엇갈리면 눈길을 돌리며 마치 모르는 사람대하 듯 한다. 함정에 빠진 사람을 구해주기는커녕 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고 돌을 던지는 사람이 이 세상에는 널려 있다.”
뭇사람의 사태가 각박함을 한탄하며 한유가 쓴 <유자후묘지명>의 한 구절이다.
옛 성현의 말씀과 같이 지금과 같은 경기 침체의 시기에는 어느 정도 그 사람을 판단할 근거가 생긴다고 본다. 만약 상대가 시련에 처한 상황이라면, 시련에 대처하는 그의 지혜나 인내력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조차 지켜지는 그의 도덕성을 볼 수 있을 것이고, 반면 내가 시련에 처한 상황이라면 상대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나의 배경이 아닌 순수한 나를 대하는 태도인지 아닌지를 알 수가 있기 때문이다.
추위가 오기 전에는 모든 나무가 다 푸르다. 추위를 겪은 뒤라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모름지기 어려움을 겪고 난 후라야 그 존재를 제대로 볼 수가 있다. 이 시기도 곧 지나가리라는 말처럼 변함없는 절의가 그리운 시절이다.